대학사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이라는 시다. 늦여름 오후 산 능선을 타다 보면 꽃도 꽃 같지 않은 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들꽃은 굳이 이름을 몰라도 창피하지 않다. 그래서 의미를 달지 않고 좋아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세히 보아도 어렵다. 오래 보아도 똑같다. 너만 그렇다.” 많은 이에겐 ‘영어’와 ‘클래식’이 이런 존재다.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 돌아오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좌절과 열등감이다. 영어과외도 받고, 학원도 다니고, 어학연수도 가보지만 외국인 앞에 서거나 토익 시험을 보고 나오면 한없이 작아진다. 다가갈수록 멀어져 가기는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눈 내리는 거리를 내다보며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낯익은 선율이 흐른다. 함께 간 동행이 묻는다. “저 음악 뭐지요?” “음~~ 클래식이야…” 들꽃과 달리 클래식은 이름을 모르면 쪽 팔린다.

그래서 도움이 된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영악한 사람들은 남이 힘들 때 이걸 돈 벌이에 이용한다. 우울한 청년 백수가 많은 요즘은 ‘청춘팔이’가 유행이다. 온 국민이 잠재적 고객이 될 수 있는 ‘건강팔이’는 스테디셀러에 속한다. 세계화 시대로 진입하며 ‘영어팔이’는 하나의 산업이 된지 오래다. 얄팍한 상술로 도배가 된 ‘교양팔이’도 나름 돈벌이가 되니까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닐까. 철학이나 클래식처럼 뭔가 우아하고 고상한 것에 대한 우리 보통 인간들의 선망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빠른 성취의 지름길을 알려준다는 이런 부류의 책들은 실상 별 효과가 없다. 부분적인 지식은 얻겠지만 나를 확 달라지게 만들 계기나 감동을 받긴 어렵다. 어차피 남 얘기니까. 나는 영어나 클래식 같이 쉽게 정복하기 힘든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남이 제시하는 객관적 방법론에 집착하기 보다 뭔가 강한 자기 확신의 순간을 느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령은 그 다음에 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원래 말은 논리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한두 해 동안 엄마 가슴팍에서 엄마 입술을 쳐다보며 따라 하는 것이다. 음악은 고상한 상식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예술가의 영혼을 따라잡을 때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어와 클래식의 문턱을 넘는 방식은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 숱한 클래식 서적이나 영어 학습서가 나에게로 오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언이 내 가슴을 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클래식 음악에 좌절했던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가까이했는데도 여전히 뭔가 서먹서먹한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을비 죽죽 내릴 때 파전과 막걸리를 동지 삼아 나훈아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상이 엿 같고 그 속에 얽혀 사는 내가 싫어질 때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을 반복해 들으면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 뽕짝이나 팝송은 긴 여운은 없지만 짧고 강한 울림을 준다. 반면 클래식은 진정한 위로라는 측면에서는 늘 나에게 인색했다. 기껏해야 좋아하는 악장이나 소품을 골라 반복해 듣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클래식 음반을 사 모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내가 나아지기를 바랬지만 이렇게 머리로 익힌 음악은 나를 진정한 애호가로 만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클래식 접하는 방식을 확 바꾸어 보았다. 그리고 팍 달라졌다. 공연장에 직접 찾아가 연주를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연주자들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평소 지루해했던 악장까지도 빠져들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같은 곡을 음반으로 다시 들어보면 전 악장의 흐름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세계적인 명연주 음반을 골백번 듣는 것보다 유명세는 덜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연주하는 그들의 숨소리를 직접 느껴보는 것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 느낀 것이다. 이런 소중한 느낌이 나로 하여금 몇십 년을 주저했던 클래식에 성큼 다가가게 했다. 요즘도 자주는 아니지만 좋은 연주가 있으면 틈틈이 공연장을 찾는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박사과정 교수시절 합쳐 10여년을 미국에서 보냈지만 나의 생활영어는 미국에서 태어나 몇 년 살다 온 내 딸의 근처에도 못 간다. 대사가 빠르거나 슬랭이 많은 드라마나 영화는 절반도 못 따라 간다. 가끔 외국에 나가면 첫 주는 혀가 굳어 식당 주문조차 버벅댈 때가 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영어를 책으로만 배우던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하지만 난 이런 일로 좌절하지 않는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대신 내 공부에 필요한 영어는 그런대로 감당할 만하다. 외국에서 강의할 때도 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이 정도의 자신감이라도 갖게 된 것은 나 스스로 ‘영어를 좋아하는 법’을 대학시절에 터득했기 때문이다. 뭐 대단한 비결도 아니다. 우선 나는 영어학원 다니는 것을 배제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득보다 실이 크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어떤 영어 표현을 보면 그것을 일단 암기한 후 마치 내가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적당히 문장을 바꾸어 표현해 보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외국 방송을 통해 영어로 뉴스를 듣고 드라마를 즐기려(!) 했다.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갈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지만 영어를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생활의 일부로 만드는 노력을 나름 한 셈이다.

내 클래식 실력은 장조와 단조 구분도 제대로 못할 만큼 여전히 형편없다. 그래도 지금은 베토벤만 듣지는 않는다. 내가 뭔가를 가슴으로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과 비교할 성질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핵심이다. 좀 창피한 고백일지 모르지만 난 요즘도 영어공부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 괜찮은 영어 칼럼을 하나 골라 반쯤 암기하는 식으로 읽는 것인데, 두뇌 훈련도 되고 세상 보는 식견도 넓어진다. 무엇보다 내 영어실력 성장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 흐뭇해진다. 배움에는 마침표가 없다. 남들처럼 화려한 성취는 아닐지 모르지만 스스로 뭔가를 이루고 있다는 소박한 기쁨은 누구에게나 영혼을 적시는 가랑비가 된다. 이름을 몰라도 마주치면 정겨운 들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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